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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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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슈가로프한인교회 작성일21-11-06 10:41 조회2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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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사랑의 뜨거움이 불볕 더위의 여름과 같을까. 여름 속에 가만히 실눈 뜨고 나를 내려다보던 가을이 속삭인다. 불볕처럼 타오르던 사랑도 끝내는 서늘하고 담담한 바람이 되어야 한다고—눈먼 열정에서 풀려나야 무엇이든 제대로 볼 수 있고, 욕심을 버려야 참으로 맑고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다고—어서 바람 부는 가을숲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들도 기도의 말들도 모두 너무 투명해서 두려운 가을빛이다. 들국화와 억새풀이 바람 속에 그리움을 풀어헤친 언덕 길이서 우린 모두 말을 아끼며 깊어지고 싶다. 가을 하늘에 조용히 떠다니는 한 조각의 구름이고 싶다.


‘나무에선 돌이나 쇠붙이에서 느낄 수 없는 생명감과 정서를 느낀다. 나무향기를 맡고 싶다. 나무향기를 내는 벗을 갖고 싶다. 나무향기로 남고 싶다.’


이상은 이해인 시인의 “가을엔 바람도 하늘 빛”이라는 제목의 산문에 나오는 글입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시흥이 돋는 것도 아닌데 왠지 시인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겨울을 재촉하는 시린 바람을 맞으면서 마지막까지 버티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나뭇잎이 그렇게 안쓰럽다 못해 평화롭게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 중 아이러니이겠지요.  올 한 해도 잎사귀를 내 주신 조물주께 할 몫을 다했노라고 감사 찬양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은 억지로 만들어내는 시흥일까요? 


교회 앞 마당 감나무에 올 해도 어김없이 어린아이 주먹만한 감들이 걸렸습니다.  봄부터 여름내내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설움에 아랑곳 없이 튼실하게 자기 몫을 해 내는 두 개의 감나무가 저의 마음을 숙연하게 해줍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과일나무 중에서 잎이 다 떨어져도 끝까지 나뭇가지에 붙어있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과일은 감 뿐이라는.  주님 앞에서 가져야 할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가을을 탄 마음 때문 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틀란타 프로 야구팀이 월드씨리즈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1995년 이후 26년 만에 우승했다고 하는데, 그동안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26년 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옛날 전쟁 노래와 손짓을 하며 응원하던 모습이 괜히 싫어 좋아하지 않게 된 야구팀이 있는 아틀란타에 와서 20년 가깝게 사역하게 될 줄이야 그 땐 몰랐지요.  그리고 26년 전 아틀란타 야구팀이 우승하던 해에 태어난 둘째 아이가 벌써 스물 여섯살이 된 것도 믿기지 않고요.  그렇게 우리는 가을 야구와 함께 나이먹어 가나 봅니다.


아, 아틀란타 브레이브스 팬이신 교우 여러분, 축하합니다!


그리고 바쁘고 고단한 이민자이신 여러분들에게 가을의 정취를 한번 느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사귀가 보인다

잎 가장자리 모양도

잎 맥의 모양도

꽃보다 아름다운

시가 되어 살아온다


둥글게 길쭉하게 

뾰족하게 넓적하게 


내가 사귄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얼굴이 

나무 위에서 웃고 있다


마주나기잎

어긋나기잎

돌려나기잎

무리지어나기잎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운명이

삶의 나무 위에 무성하다.


-이해인시인의 “잎사귀 명상”